홍익대학교 금속조형디자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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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따 - 임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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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팀 작성일17-09-04 16:06 조회1,0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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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봄 공예관(현재의 미술실기실별관) 2층 금속공예전공 실기실에서는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인 ‘고사(告祀)’라는 행사가 있었다. 말하자면 현재의 ‘해오름식’과 같은 것인데, 참석 인사의 구성에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요즘에는 학부생 전체, 석사대표, 박사대표 및 교강사 몇몇 분들이 전부인데 반하여 당시에는 이들과 더불어 사회활동을 하시는 선배들이 대거 참가하여 동문 선후배가 다 함께 모이는 커다란 잔치로 성황을 이루곤 하였다. 의례 정해진 예식이 끝나면 모두가 뒤풀이에 참석하여 선후배 간에 정감을 이어가곤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치러지던 ‘고사’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빠따’라는 것이 있었다. 쉽게 말해서 몽둥이로 -아마도 당시에는 대걸레 자루 같은 것으로 맞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엉덩이를 두들겨 맞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청소상태가 불량하다.’, ‘모루에 얼굴이 뿌옇게 보인다.’와 같은 이유를 달지만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거울보다 더 반짝거리게 광을 내도 ‘빠따’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남학생들에겐 그야말로 ‘고사’날이 ‘고삿날’이 되는 날이었다. 이 ‘빠따’의 유래는 70대 초 학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목적에 관해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나의 짐작으로는 ‘한국인들의 맹목적인 무식한 군기 잡기’ 쯤으로 여겨진다. 81학번인 나는 그 당시 격변기 사회에 전경으로서 고난의 군 생활을 마치고 복학 생활을 시작할 무렵이었기 때문에 지성의 상징인 대학에서의 구타 행위는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당시 몽둥이를 든 사람은 75학번인 대학원생이었는데 79학번인 4학년 선배가 순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맞긴 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2010년 겨울 2학년 실기실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공예관이 보인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실기실 내부를 둘러본다.
‘어지럽다’
학년전용실기실이 없이 전 학년이 공동으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공예관은 항상 깨끗했었다. 그 당시의 공예관이 깨끗했던 것은 선배들이 고사 날을 빌미로 ‘빠따’를 쳐가면서 군기를 잡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공예관 2층이라는 작은 공간을 중심으로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서 내 방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곳에서 탄생한다고 나는 굳건히 믿는다.
이젠 ‘빠따’가 없어진 지 오래고, 더불어 선후배 간의 돈독함도 사라졌다.
‘빠따’가 없어져서 ‘청소’까지도 사라진다면 너무도 슬픈 일이다.

나는 ‘빠따’를 싫어하는 만큼이나 잔소리하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나 끝내 참다못해 한마디 한다.

“청소 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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