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라는 낙인 혹은 피그말리온? - 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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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팀 작성일17-09-04 15:33 조회1,61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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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사회학학 이론 중에서 낙인 이론(labeling theory)이 라는 것이 있다. 제도·관습·규범·법규 등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제도적 장치들이 오히려 범죄를 유발한다는 것이 낙인 이론의 요체이다. 사회적 규범에서 볼 때 어떤 특정인의 행위가 이 규범에서 벗어났을 경우, 구성원들이 단지 도덕적인 이유만으로 나쁜 행위라고 규정하고 당사자를 일탈자로 낙인찍으면 결국 그 사람은 범죄자가 되고 만다. 당사자의 행위 자체가 범죄가 되거나 반도덕적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그렇게 규정함으로써 범죄를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1. 낙인이론과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 낙인은 소나 돼지 혹은 목재 등에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서 불에 달구어 찍는 쇠도장이다. 요즘 쓰는 것으로는 레테르나 라벨이 있다. 그런데 이 낙인을 사람한테도 붙인다. 지금 같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상품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이런 것을 찍고 붙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팔아먹을 수 있으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낙인을 찍을 수 있다. 문제는 낙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표식의 낙인을 찍으면, 낙인찍힌 사물이나 사람은 낙인의 내용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낙인의 내용대로 되는 것을 낙인효과라 한다. 어떤 아이에게 ‘바보’라는 낙인을 찍으면 그 아이는 점점 바보가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낙인의 내용을 의심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내용을 받아들이고 의기소침해지며 점점 바보같은 행동의 횟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낙인은 개인에게만 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몇몇 나라들에(예컨대 아랍의 몇몇 국가들과 북한) ‘불량국가’라는 낙인을 찍었으며, 그 낙인의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악의 축’으로 낙인의 내용을 갱신하기도 했다. 이러한 낙인은 정말 그들 나라가 악한 나라라고 생각게 하여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한한다. 그들은 단지 미국과 생각이 같지 않을 뿐이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여 이산화탄소를 줄이자는 ‘도쿄의정서’에 미국은 참여하진 않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낙인을 찍지 못한다. 낙인은 아무나 찍는 것이 아니다. 낙인이론과 상반되는 것으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인데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 반한사람이라고 한다. 하여튼, 피그말리온 효과는 누군가에 대한 기대나 믿음 혹은 예측이 그 대상에게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데, 기대에 대한 자기암시 혹은 자기 충족적 예언과 관계되는 것이다. 로젠탈과 제이콥슨이란 사람이 한 초등학교 학생들 대상으로 지능검사를 하고 피검사자를 무작위로 뽑아서 지능검사결과 ‘똑똑한’ 아이들이라고 말하였더니 정말 성적도 오르고 지능지수도 올랐다고 한다. 이들은 이런 현상에 피그말리온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긍정적인 낙인이론’이다. 그런데, 낙인을 찍건 긍정적인 자기암시를 주건, 문제는 누가 그것을 하며 무엇 때문에 하는가? 라고 할 수 있다. 낙인이론은 낙인을 찍기 위한 전제로 규범설정에 관한 것을 다룬다. 사회구조의 위계(hierarchy)적 조직화를 통해 권력을 가지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규범을 설정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관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이나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일들을 ‘일탈’이라고 규정하며, 이러한 일탈에 낙인을 찍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낙인에 담겨진 내용은 사회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구성되며, 권력을 가진 자들 만이 낙인을 찍을 수 있다. 피그말리온 효과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으로 평가가 온당하다고 여길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낙인 이론에서 ‘낙인’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논점은 일탈적 자아규정과 내적 동조성이다. 낙인이 찍힌 사람은 부정적 자기암시를 통해서 동조적 행위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결합하며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원활치 않을 경우 내적 동조성을 가지고 낙인으로 규정된 내용을 확대재생산하고 나름의 질서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낙인은 지배에 의한 피지배를 강화하는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피지배자 스스로 그것을 강화하게 되는 고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강화의 고리는 점점 내적 질서로 보편화된다는 것이다. 2. 공예는 낙인인가? 요즘은 미술이나 공예 그리고 디자인이라는 범주를 시각예술이나 조형예술이란 말로 통합하거나, 혹은 범위를 넓혀서 그 외의 새로운 것까지 포함하여 시각문화라고도 한다. 그러나 지난세기까지만 해도 미술과 공예 그리고 디자인의 분리와 범주는 계몽주의 이후 만들어진 모더니즘의 강령 혹은 르네상스부터 이어온 미술의 독자적인 권리와 관계되어 구성되었다. 공예라는 것은, 일종의 부정적 정의로 ‘남은 것’을 의미했다. 미술과 공예 그리고 디자인의 분리 이전의 원형은 그것이 통합된 양상인 근대화 이전의 ‘기술적 제작술’이라 할 수 있다. 총체적인 ‘제작술(art)’에서, 우선 미술이 정신성이라는 가치를 독자적 특성으로 가지면서 분리되고 이후 디자인은 산업생산물과 연관됨으로써 분리되어 나간다. 그리고 남은 것이 공예이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이 아니라 분리되어 나간 명분이다. 미술은 창의성과 정신성을 독자적인 특성이라 주장하고 그 특성에 ‘fine’이라는 말을 붙여서 fine art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디자인의 경우는 한발 더 나간다. 그들은 아예 제작술(art)이라는 말을 떼버리고 ‘무엇인가 계획한다는design 범주를 새로 만들었다. 이것은 손수 만들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손으로‘라는 것을 없애버린 것이다. 미술에서 ‘fine'이라는 레테르는 결과적으로 피그말리온 효과를 가져 온 듯이 보인다. 미술이 제작술로부터 독립하고 20세기 부르조아 문화의 총아가 된다. 미술은 공예와 디자인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어휘로 자리 잡았으며 그 중심에는 회화가 있다. 나이 지긋한 양반들 중에서 ‘미술 그린다’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제작술 중에서 정신적인 성격이 강하고 실재의 쓸모를 가지지 않은 감상용의 제작술인 미술은 그 ‘정신성 혹은 비실용적 특성’이라는 의미부여가 자기암시를 통해서 보다 창의적으로 변해가는 국면을 가졌다. 20세기 내내 그들은 새로움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특성을 ‘전위’라는 멋진 이름으로 부른다. 디자인의 경우, 손수 만들지 않는다는 개념은 한꺼번에 많아 만들 수 있는 시대를 만난다. 그들은 오히려 손수 만들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손으로 만들지 않는 다는 것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일과 동의어이고 그들은 손수 만들지 않음으로써 더 다양한 것을 할 수 있어졌다. 그들은 ‘계획’이라는 말로 인간의 시각과 관계된 모든 것에 개입한다. 그들은 ‘계획’만 하면 되므로. 아마도, 제작술에서 분리된 삼형제 중에서 가장 득이 않았던 것은 이들이 아닌가 싶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대를 전방위적으로 넓혔으며, 심지어 그들에게 붙은 레테르인 design은 시각문화를 넘어서 사회전반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되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기엔 그들의 성과는 너무 대단하다. 문제는 공예의 경우이다. 그들은 레테르는 근대화 이전의 제작술, 즉 삼형제가 분리되기 전의 개념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근대화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미술처럼 정신성을 특권적으로 획득하지도 않았고, 디자인처럼 계획만 함으로써 보다 많은 일을 하게 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손으로 무엇을 만들며, 무엇엔가 용도가 있다고 ‘fine이 정해 준’, 그리고 미적특질을 가진 것을 만든다. 그런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비율은 근대화 이전에 비해서 현격하게 줄어버렸다. 20세기 이후에 공예라는 말의 위기가 시작된다. 공예라는 이름에 실행이 제한되어 버렸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낙인 이론에서 말하는) 자기규정과 내적 동조성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서 레테르를 강화하거나 고수하려는 입장들이라 할 수 있다. 공예는 근대화 이전의 전통을 고스란히 담지한 것이므로, 그것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 일이 문화적 전통과 관련하여 중요한 일이라는 ‘자기암시’의 경향들이 발목을 잡는다. 종종 그 전통이라는 것으로 공동체에게 손을 벌리기도 한다. 공예는 늘 동조적 행위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찾아보지만 그것이 원활해보이지 않는다. 낙인 이론에 따르면, 그럴 경우 내적 동조성을 가지고 낙인으로 규정된 내용을 확대 재생산한다는데, 공예의 경우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자신이 공예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 공예계를 구성한다고 생각되는 인구 중에 그렇게 많지는 않다. 어떤 이름으로 자신을 지칭할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식이든 이득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공예가라는 이름은 그다지 이익을 주지 못하는 듯싶다. 간혹, 이로울 때가 있긴 하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공예’라는 이름에 예산을 편성하는데, 그것으로 무엇을 해보려는 사람들은 그 이름을 사용한다. 조합도 만들고 재단도 만들고 진흥원도 만들지만, 아마도 그들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거나 많이 생각해보지 않았지 싶다. 현실이 가슴 아프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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