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한국에 들어와서는 거의 처음으로 키네틱에 관련된 작품을 본적이 있다.
인사동의 김진혜 갤러리를 꽉 들어차 있던 물이 떨어지는 기계와 반사체, 그리고 영사기가 함께 돌아가는 복잡한 구조처럼 보이는 이러한 기계작동을
통해 예측하지 못한 운동성을 바라보게 되었던 그 작품은 사실 작가의 이름이나 그 작품의 조형성보다는 그 예술적 기계가 어떻게 움직여 나의
뒷모습을 내가 바라보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작동의 기술적 매커니즘이 얼마나 전문적인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즐거운 탐색처럼 그 전시장
안에서 물이 떨어지는 반사체들 사이에 상이 맺혀 보여 지는 그 복잡한 기계는 어린 시절 너무나 해보고 싶었던 괘종시계의 시계밥을 감아주던
일만큼이나 기대와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또한 그 복잡한 기계의 일부를 이해해보고자 노력함은 개인적인 이공학의 콤플렉스를 자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키네틱아트는 어쩌면 한국어로는 표현 부적절한 예술의 장르일지 모르겠다. 우리는 예술이란 "ART" 가 그리스어「τεχνη
techné(테크네-)」나 그 번역어로서의 라틴어「ars(아르스)」어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techne는 인공적이란 의미에서
예술, 미술을 의미하고 그리고 그것이 기술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도 안다. 물론 그러하기 때문에 키네틱 아트의 형성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키네틱의 어원을 살펴보면 'Kinesis(=movement)'와 'Kinetic(=mobil)'에서 알 수 있듯이
움직임을 본질로 하는 미술을 칭한다. 운동성과 움직임에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회화와 조각 속에서 우리의 시각능력과 뇌의 연상능력을 통해
충분히 그 운동성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예술의 역사를 곰브리치의 말처럼 ”환영의 역사“로 파악한다면 키네틱 아트는 ”쓸모가 없는 기술적
발명품“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한국의 척박한 회화만의 세상에 간간히 떠오르는 환상과 상상속의 운동성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되면 그저 즐겁기만 하다. (이 몹쓸 이공학 콤플렉스~) 키네틱 아트라 칭하면서 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
몇몇은 마르셀 뒤샹, 라즐로 모홀리 나기, 장 팅겔리, 그리고 백남준이다. 물론 혼재 되어 있는 현대미술의 장르에서 어떤 사람은 추상미술가로,
어떤 사람은 환경조각가로, 어떤 사람은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야기 된다. 그러나 어떠한 호칭이건 그들 4인의 공통점은 기계를 사용한 시각적 환영의
구현이다. 거의 키네틱 아트라 칭할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1913년에 만든 자전거 바퀴를 가지고 만든 ‘모빌’이다.
키네틱 아트의 등장을 가능케 한 20세기 초기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우선 산업혁명 이후의 기계화를 들 수 있다. 미래주의, 구성주의,
바우하우스 운동은 예술에 있어 기계를 미학적 요소로 수용하였고, 다다와 초현실주의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문명비판의 은유적 방법으로써
기계를 도입했다. 또한 입체파와 미래파는 그들의 다각적 공간 개념을 4차원의 과학적 개념과 연관시켰다. 1922년 알프레드 켐메니
Alfred Kemeny와「역동적-구성적 형태의 체계에 관한 선언문(Men ifesto on the System of Dynamic
Constructive Form)」을 발표한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는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고전적 예술의 정적 원리를 보편적 예술의 동적 원리로 대체해야 한다."라는 그의 주장은 때론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자신의 환영을
실제화하고 싶었는가를 느낄 수 있다. 모홀리 나기의 작품이 갖는 움직이는 힘은 원형 그 자체보다는 반영(Reflection)에 더 의존하였다는
것을 그의 작품들의 재료와 조형적 특질을 통해 더욱더 잘 알 수 있다. 그것에 비해 장 팅겔리는 마치 최초의 증기기관차의 환생을 보는
듯이 유아적 놀이로서 자발적인 기계의 운동성과 상상을 통한 가시적 운동성을 통합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움직이는 조각들은 때론 퐁피두 광장의
“스트라빈스키를 위한 분수”에서 아이들의 유쾌한 웃음처럼 깔깔거리며 관람객에게 장난을 치며 다가오거나 혹은, 거대한 고물들의 변형체로 인간들의
본질을 비판하며 변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그의 작품은 시각뿐만이 아닌 오감을 충족시키는 무언가를 관람객들에게 전달한다. 바젤의
시청사 앞에서 만나게 된 마치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펌프처럼 때론 힘겹게, 때론 경쾌하게 물을 뿜어내는 그의 분수조각은 모든 행인들의 재미있는
놀이기구였다. 기계와 운동성과 더불어 인간의 현실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매커니즘을 통한 그 누구보다 더 재미있는 상상은 바로 백남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그의 많은 비디오작업은 그 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나게 빠른 화면전환을 통해 만들어졌다. 기계적 조작을 통해 만들어낸
화면들의 파열적인 형식은 그의 작업의 전반을 통해 시간성, 운동성과 우연성의 방법으로 지배하고 있다. 그의 초기적 작업인 피아노를 때려 부셨던
1959년의 플럭서스 공연에서의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침'이라는 작업에서부터 볼 수 있었듯이, 그의 그 당시까지의 생애를 지배하였던 음악이
미술로 전환하며 “파열”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였음은 아마 우연이 아닌 그의 내재된 전위적 상상의 세계였을 것이다. 그의 거의 후반기 작업이라
이야기되는 ‘빛의 폭포’는 거대한 현대 미디어의 집산처럼 기계와 예술의 경계에서 하늘에서부터 내리는 빛을 구현하려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백남준 생의 소명처럼 느껴진다.) 그것 역시 빛이란 것이 자연광이 아닌 전자의 빛으로 그가 평생을 끌어온 그만이 느꼈던 전자적 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방을 넘어선 새로운 형의 발견이후 인류가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창조성은 새로운 운동성의 창조이다. 식물의 성장, 동물의
운동,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오늘도 열심히 나의 눈과 귀, 그리고 코와 혀를 즐겁게 하는 그리고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이 그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 될 것이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욱이 그것들이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존재들의 운동이라면
상당히 역동적인 상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의 꽁지- 아마 위의 글의 작품들은 많은 학생들이 도판으로 찾아 볼 수
있겠지만 키네틱 아트의 조형적 형식은 그 운동성을 배재 하고는 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며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계들의 구조는 현대적 조형미에서 구조와 기능, 운동을 상상하고 그 상상이 빗나가면서 더욱더 호기심을 자극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호기심만을 자극하는 것이 예술의 모든 것이 아님이다. 도리어 그 호기심속에서 예술적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2008년 갤러리 Parotta 기획의 Maschine(기계)라는 전시에서 설치되었던 작품들이다. 이 전시에서는
여러 작가들을 선정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오브제로써 기계’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품을 제작하게 하고 전시 하였다. 기계 방법을 넘어선 인간적
감성의 메타포를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