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학교 금속조형디자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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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보행에 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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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팀 작성일17-09-04 23:02 조회1,1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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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이안와 인터넷을하다가 

재밌는 글을 발견해서 한번 올려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출처 : http://www.designflux.co.kr/first_sub.html?code=2594&page=1&board_value=dailynews&cate1=7


[김산]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글. 김산(디자이너)

걸음걸이는 나의 경쟁력

나는 늘 빠르게 걷는 습관이 있고 가끔 걸음이 빠르다는 주변사람의 말을, 도시에서 생존할 경쟁력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는 듯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약속시간에 늦지도 않았는데 내 앞에서 문이 닫히는 지하철을 보고, 한발차이로 정류장을 떠나는 버스를 보고 속상해 하는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오랫동안 길의 정취를 말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바닥의 패턴을 보면서 암호를 해독하듯이 걷기도 하고 낡은 벤치에 앉아서 등판의 각도가 어떠니 하면서 혼자 중얼거릴 때도 있었는데 말이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지? 


계단마다 부착된 우측보행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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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cument Start -->지하철 곳곳에 설치된 우측보행 홍보 배너

시간당 인건비가 점점 낮아지는 디자이너에게 걸음걸이라도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고 다독이는 가운데 우측보행을 알리는 안내문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벽에도 바닥에도 모자라서 계단 틈틈이 알뜰하게 오른쪽으로 다니라는 내용이 가득하다. 출퇴근시간에 서로 엉켜서 진로방해를 하는 것보다는 방향을 정해두어 혼란을 막는 것일 테니 좋지 아니한가. 그런데 평생 왼쪽으로 다니라는 얘기만 듣다가 왜 또 오른쪽으로 급히 바꾸어야 하는 것일까. 어쨌든 우측보행 캠페인은 묘하게도 오른쪽으로 향하는 오늘의 사회와 닮아 있다. 


<!-- Document Start -->국토해양부의 우측보행 공식포스터
출처: www.rightwalk.go.kr 자료실 


안전과 속도

우측보행 도입 이유를 들어보면, 교통사고를 20% 줄일 수 있고 보행 속도가 1.2~1.7 배 빨라진다는 점도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만큼 냉정한 느낌을 받게 된다.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살려면 사고 없이 보행 속도도 지금보다 빨라져야만 한다는 논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빨리 움직여야 하는가. 


<!-- Document Start -->우측보행의 효과를 알리는 시뮬레이션 자료
출처:
 www.rightwalk.go.kr

우측보행보다 더 나은 가속화 방침, 예컨대 단위 면적당 이동 인원을 늘릴 수 있게 모든 사람이 조금씩 더 날씬해지자든가 옆으로 걸어보자든가, 아니면 걷는 연습을 통해서 보폭을 한걸음에 1cm씩 늘이자든가 하는 기괴한 상상도 해본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람은 그러거나 말거나지만 뚜벅이들에게는 새로운 스트레스가 된다. 왜 출퇴근으로 매일 두 시간 이상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지, 왜 지하철 역은 백화점, 쇼핑몰과 연결시켜서 북적거리는 통로를 한참이나 지나야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인지, 왜 그렇게 환승 거리는 멀기만 한지, 의문만 제기하는 것은 몸에 나쁘다. 차라리 도시에 사는 이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하루 만보걷기를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그래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은 단 한 가지 메시지, “오른쪽으로 걷자“를 담은 홍보물이 막무가내로 공공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른쪽으로, 뒤로

홍보물이 거의 융단 폭격에 가깝다. 그런데 그래픽 수준은 70년대를 연상시킨다. 수출증대, 산아제한 등 계몽포스터의 향수 어린 이미지와 참 많이 닮아 있다. 서울메트로를 비롯한 관련 기관들이 작년에 별도의 예산을 책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설 개선과 홍보물 제작을 해야 했다고 하니 과정이 어떠했을지는 뻔하다. 이미 책정된 다른 사업들에서 일부 가용한 예산을 임시로 배정했을 텐데 디자인과 제작비가 정상적일 리 만무하다. 공공디자인으로 전국이 날로날로 세련되어가고 더구나 서울은 올해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되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중요한 때가 아닌가. 


<!-- Document Start -->우측보행 홍보 포스터, 2009 


<!-- Document Start -->세계 인구의 해에 제작된 가족계획 포스터, 1974, 대한가족계획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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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안내방송을 하면서까지 강조할 사항이라면 전달하는 형식은 최소한의 수준을 갖추어야 공공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불법 홍보물처럼 덕지덕지 이어 붙여놓은 포스터, 모퉁이마다 공간을 차지하는 싸구려 배너는 창의도시, 디자인수도 서울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 Document Start -->우측보행을 알리는 공식배너
출처: www.rightwalk.go.kr 자료실 

 
<!-- Document Start -->지하철 곳곳에 설치된 우측보행 홍보 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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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더 왼쪽으로>의 저자, 박노자는 본문에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는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일갈한 바 있다. 그는 오늘의 한국이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쳤고 복지자본주의만이라도 성취하려면 왼쪽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왼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 보았고, 현 위치에서 정지해버리는 것은 과거로의 퇴보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우측보행과 그것을 알리는 시각물이 사회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오른쪽으로 다니기를 종용하는 홍보매체는 심하게 뒷걸음치고 있다. 


비정한 걸음

보행, 즉 길을 걷는 것은 단순히 어떤 지점에 이르려고 서둘러 가는 과정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도시라는 커다란 공장을 돌리는 것 같이 컨베이어벨트와 화살표로 통근자의 걸음을 돕고 마침내 과학적인 논리로 효율적인 보행에 적합한 방향도 지정되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좀비가 아닌 이상, 인파에 떠밀려 이동하더라도 앞서 가는 사람의 머릿결에서 흘러나오는 향으로 무슨 샴푸를 쓰는지 가늠하거나, 흐트러진 아저씨의 몸에서 품어 나오는 삼겹살 냄새 정도는 맡으면서 걷게 된다. 그리고 가끔 신선한 글과 이미지를 보는 낙도 있고, 꺾인 길과 높고 낮은 곳을 지나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길을 따라 걷는 템포도 있고 걸음의 질도 있는 것인데, 이것을 질서와 유속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참으로 비정할 것이다. 

가끔 지하철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가야지’라고 호통치는 어르신을 볼 때도 있다. 정부 방침에 따라 정해진 방향을 거슬러 예전처럼 왼쪽을 고집하는 이들이 괘씸해 보이셨던 모양이다. 수십 년 동안 불편함을 모르고 이용해 온 버스의 번호도 체계적인 원칙에 따라 정해졌다는 네 자리 숫자로 대체되었고, 지도를 꼼꼼히 보면서 길을 익히던 능력도 네비게이션으로 대체되었으며, 산하의 풍경도 고속철도의 질주 속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니, 아무리 몸에 익은 보행 방향이라 하더라도 바꾸라면 바꾸어야 하지 않겠나. 또 따지고 보면 늘 왼쪽으로 다닌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다녔으니 바꾼다는 표현이 적절하지도 않은 것 같다.


all photos by Kim San 

왼쪽 보행이었든 자유로운 보행이었든 이제는 무기력하게 오른쪽으로만 걸어야 하는 내게는 이제 창의적인 보행, 주체적인 보행과 같은 어느 지리학자의 말이 아득하기만 하다. 길과 걸음이 갖고 있는 함의는 분명히 살아 있을 텐데, 어쩌다 그런 것을 느낄 여유 없이 보행의 속도에 나의 감각을 마비시키게 되었을까. 길이 주는 시각적인 자극과 공간감 정도는 느낄 여유가 있어야, 당신들의 홍보물, 아니 저임금 속성 시각문화의 파편들도 보며 지나갈 것 아닌가요, 라고 우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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