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언의원 부인 이화익갤러리 대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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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팀 작성일17-09-03 21:15 조회2,6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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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인사에 대해 쓴소리를 날려 뉴스의 초점이 된 정두언(51)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은 화랑 주인이다. 정 의원의 부인 이화익(51·‘이화익 갤러리’ 대표)씨를 만나 보았다. 정 의원이 화제가 되면서 화랑 사업도 영향을 받지 않겠느냐는 일부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그는 “남편 일과 내 일은 별개”라고 말했다.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송현동 ‘이화익 갤러리’에서 만난 그는 “말이 많이 나더라도 내 할 일은 할 것”이라고 했다.
-요즈음 정두언 의원 발언이 정가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정치 얘기를 많이 나누십니까.
“정 의원이 워낙 밖에서 말을 많이 하는 편이라 집에 오면 쉬고 싶어 합니다. 저도 정치 얘기를 즐기는 쪽이 아니라 묻거나 하진 않죠. 우연히 전화 통화 내용을 듣거나 누구라도 궁금해할 만한 사안이 있을 때는 한두 마디 묻지만 그게 다예요. 평소에도 당신 일은 당신이, 내 일은 내가 한다는 주의라 서로 참견은 안 하죠.”
-정 의원께서는 일하는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1984년 결혼해 시댁에 들어가 살았는데 당시 공무원이었던 남편 월급이 박봉이었어요. 저는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시간강사를 할 때였는데 아시다시피 시간강사료가 몇 푼 되나요.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라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문직을 뽑는다는 정보를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당시 덕수궁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 학예연구원으로 들어간 거죠. 남편은 처음부터 제가 일하는 걸 적극 밀어줬어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맞벌이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오죽하면 애 둘 낳고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기 힘들어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더니 ‘하시던 일이나 하슈’라고 했을까요. 지금도 선거 때 조금 도와 달라는 것 말고는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일절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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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의원과 어떻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되셨는지.
“76년 봄 대학 신입생 때였지요. 우리가 동갑이라 같은 학번인데, 저는 이화여대 문리대 1학년 3반 반대표, 정 의원은 서울대 사회계열 1학년 3반 반대표여서 개강 파티를 함께 주선하게 됐죠. 그때는 일로 만나 호감은 느꼈지만 그저 잊을 만하면 우연히 만나는 편한 친구 사이였어요. 그렇게 데면데면하다가 저는 유학을 떠나고 그는 군대를 갔는데 그사이에 시어머님 되실 어른이 오히려 저를 잘 보셔서 집으로 연락을 하셨어요. 친정어머니도 신앙심 깊은 친지로부터 남편이 ‘(교회) 장로감’이라는 평을 듣고 그 한마디에 넘어가셨죠.”
-남자 친구에서 남편이 되면서 어떤 점이 기억에 남았는지요.
“그는 말이 없고 내성적인 편이었어요. 그때 제 눈에는 그 과묵함이 남자답게 보였죠. 정 의원은 적극적이고 활달한 제 성격이 좋았나 봐요. 스타일이나 취향도 달라 옷차림 같은 것도 제가 챙겨줄 수가 없어서 자신이 직접 차려입고 다녔죠. 그 무렵 제가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 ‘국회의원 하고 싶다’더군요. 솔직히 반대는 안 했지만 공천은 못 받을 줄 알았어요.”
-정 의원이 정치에 대한 꿈을 키운 계기를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시아버님께서 정 의원의 사촌 큰아버지인 정선태 전 의원의 운전기사로 일하셨어요. 정선태 의원은 6선을 하면서 강직한 정치인으로 이름나 국회부의장까지 지내셨는데 당시 청와대 근처 삼청동에 공관이 있었나 봐요. 정 의원도 거기서 태어났고요. 정선태 의원이 남편의 역할 모델이 된 거죠. 공천 심사 와중에 찾아뵀을 때 이런 말씀을 하신 게 기억나요. 정 의원에게는 ‘정치를 할 바에는 단순히 국회의원이 되는 일뿐 아니라 대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셨고, 저에게는 ‘정치인은 그 일의 반 이상을 부인이 해야 하니 각오해라’ 당부하셨죠. 그때 저는 속으로 ‘뭐 그렇게까지’ 싶었어요.”
-20여 년 화랑업계에서 일한 전문인으로서 정치인의 아내가 되면서 불편하신 점은 없었나요.
“제가 ‘갤러리 현대’ 디렉터를 거쳐 2001년 제 이름을 내건 ‘이화익 갤러리’를 개관할 때만 해도 큰 문제는 없었어요. 다만 지난해 말 청담동 네이처 포엠 빌딩에 강남 분점을 내면서 잡음이 일었죠. 공교롭게 박형준 전 의원의 부인인 조현씨의 조현 화랑, 박진 의원의 누나인 박여숙씨의 박여숙 화랑이 한 건물에 나란히 입주하면서 말이 났어요. 당시 제 생각이 이랬어요. 뉴욕이나 베이징 등 해외에까지 지점을 내는 화랑이 늘어나는 최근 미술시장 추세를 볼 때 강북 화랑만 가지고는 상권 커버가 안 되겠다, 하지만 남편의 지역구도 강북이고 제가 살아온 기반도 여기니 크게 움직일 필요는 없지만 강남에 지역 연락사무소 정도는 하나 있어야겠다 싶어서 마련한 거죠.”
-화랑 대표 일과 정치인 아내로서의 일을 분리하고 싶다는 의미인가요.
“기본적으로 남편이 잘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20여 년 미술계에 투자한 제 몫을 포기할 수는 없죠. 조심하면 무슨 문제인가 싶고요. 또 제가 일을 크게 벌이는 스타일도 아니에요. 일례로 남편이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할 때는 서울시 관련 미술 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강남 분점도 2년 계약이 끝나면 재고할 것이고요. 솔직히 남편이 지금이야 국회의원이지만 4년 뒤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국회의원은 국회의원 안 되면 막말로 백수 아닌가요. 제가 경제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 가정을 누가 돌보겠어요. 화랑 일을 탄탄하게 꾸려 가는 것이 남편에게도 안정감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는 과거 정치인의 아내 상을 잊어 달라고 했다. 일에 자기 인생을 건 전문직 정치인 부인의 존재가 한국 정치계를 변화시키는 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은 가족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말고, 가족 또한 정치인에게 뭔가 기대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는 “남편이 더 큰사람이 되더라도 나는 내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화익 갤러리’가 열 다음 전시회를 위한 기자간담회장으로 총총히 떠났다.
출처 sunday.joins.com/article/view.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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