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학교 금속조형디자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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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바지정장·흑인모델 첫선 보인 ‘세기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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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팀 작성일17-09-03 21:13 조회2,7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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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여성에게 입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옷은 사랑하는 남자의 두 팔이다. 이 행복을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해 내가 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사진)이 전설 같았던 71년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오랜 친구인 피에르 베르제는 생로랑이 1일 밤 프랑스 파리의 자택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베르제는 사업동료이자, 한때 그의 동성 연인이었다. 

생로랑은 현대 여성의 패션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바지 형태의 여성 정장과 여성용 턱시도 ‘스모킹’을 처음 선보였다. 그가 ‘개척’한 여성용 피코트·트렌치코트·트라페즈드레스 등은 여전히 대중적인 사랑을 누리고 있다. 표범무늬나 사파리 웃옷 같은 선구적인 과감한 시도는, 패션쇼에 흑인 모델을 기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1936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생로랑은 17살 때 파리의 한 디자인 대회에서 1등상을 따내면서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54년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로 불리던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그를 만나자마자 곧 채용했다. 3년 뒤 디오르가 숨지자 불과 21살의 나이에 디오르 의상실을 떠맡은 생로랑은 디오르를 항상 “예술의 기초를 가르친” 스승으로 꼽아왔다. 

굵은 검정 뿔테 안경으로 유명했던 생로랑은 62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의상실을 열어 60~70년대 파리를 세계 패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이름 머릿글자를 딴 상표 ‘이브생로랑’(YSL)은 기성복·향수·화장품·액세서리 등으로 확장됐고, 카트린느 드뇌브나 모나코의 그레이스 공주 등 명사들을 고정 고객으로 사로잡았다. 

83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살아 있는 패션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생로랑의 작품을 전시해 그를 예술가 반열에 올렸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생로랑을 60년대 이후 세계적 경제성장이 젊은층과 여성의 경제적 자유를 증대시킨 데 따른 수혜자였다고 평가했다. 

99년 생로랑은 ‘YSL’을 7천만달러(약 710억원)에 패션그룹 구치에 넘겼다. 뒤이어 2002년 1월 고별 패션쇼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며 “나는 공포와 끔찍한 고독에 익숙하다. 신경안정제와 마약같은 거짓 친구들, 우울증의 감옥과 병원, 이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패션계는 그를 크리스티앙 디오르, 코코 샤넬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로 평가한다.

출처 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2910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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