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학교 금속조형디자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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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원장의 신입생 인삿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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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팀 작성일17-09-03 22:29 조회1,9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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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날때 천천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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刻苦(각고)

  

<장자> 내편 양생주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백정이 양나라 문혜왕에게 소 한 마리를 잡아주었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어깨를 기대거나 무릎으로 누르는 곳에서 살과 뼈가 발라져 그대로 후두둑 떨어졌다. 

칼이 지나갈 때마다 사사사삭 소리가 나는데 그게 모두 음률에 맞았다. 그의 몸놀림은 湯임금이 지었다는 桑林의 춤 같았고, 堯임금이 지은 음악 經首와 딱 들어맞았다.

문혜왕은 입을 쩍 벌리고 한참 만에 말했다. 

“야, 띵호아! 대단하다. 너의 재주가 어떻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렀는가?”

백정은 천천히 칼을 내려놓더니 바튼 기침 한번 뱉고는 대답했다. “이건 재주가 아닙니다, 전하. 제가 좋아하는 것은 道로서 재주보다 앞선 겁니다.

 始臣之解牛之時 所見無非牛者; 처음 제가 소를 잡을 적에는 보이는 건 죄다 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소만 보이는 일이 없어졌습죠.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만나지 눈으로 보질 않습니다;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감각으로 아는 것을 멈춰버리고 정신이 움직이고 싶은 대로 따라 움직일 따름입니다. 

天理, 즉 자연의 이치에 따라 큰 틈을 쪼개고 큰 구멍에 칼을 찌릅니다. 소의 본디 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부닥뜨리는 일이 없습죠.

 하물며 큰 뼈에 칼이 부딪치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1년에 한번 칼을 바꾸는데 이는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고 그런 보통 백정들은 한달에 한번씩 칼을 바꾸지요. 그들의 칼은 뼈에 닿기 때문입죠. 지금 제 칼은 19년 됐습니다. 그 동안 제가 잡은 소만해도 수천 마리가 넘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제 칼날은 숫돌에 막 갈아 내온 것 같잖습니까? 

소 뼈마디엔 커다란 틈이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칼을 아무리 휘둘러도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났지만 이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갈아놓은 것과 같은 겁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뼈와 살이 엉긴 곳을 만날 때면 저도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면 조심조심 경계하면서 눈은 그곳을 노려보며 동작을 늦추고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이지요.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후두둑 뼈와 살이 떨어져 마치 흙이 땅에 쌓이듯 수북하게 올라오는 거 있죠. 

칼을 들고 서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는 것만으로 저는 족합니다. 그리고는 칼을 깨끗하게 닦아 잘 간수해 두죠.”

“와, 짱이로다!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서 養生, 즉 삶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했노라.” 왕이 말했다.

  

2008학년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신입생 여러분!

 예술가가 되어 보겠다고 그 가열찬 첫 문지방을 넘어온 여러분에게 제가 축하에 앞서 장자의 ‘소 잡는 이야기’를 

먼저 들려준 까닭은 이 알레고리가 모두 예술가 수업에 의미심장한 암시를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신입생 여러분! 여러분 앞에 이제 여러분이 잡아야 할, ‘예술’이라는 소가 있습니다. 

어떻게 잡겠습니까? 이 놈의 소는 여러분 뜻대로 따라와 주질 않고 때로는 거칠게 저항합니다. 

여러분보다 힘이 세고 덩치가 훨씬 큰 이 놈은 잘못 다뤘다간 여러분을 들이받고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짐승입니다. 

예술 하다가 죽어버린, 혹은 죽음 가까이 갔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누군가가 잡아다 준 소로부터 고기를 썰고 있는 푸줏간 수준에서 예술가 연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진짜 첨단에서 소를 잡는 사람들은 목숨 내놓고 잡습니다. 

예술계의 ‘창조적 소수’, Creative Minority를 육성한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육 미션은 바로 ‘목숨 걸고 예술 

하겠다’는 각오를 가진 사람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

나는 예술 아니면 이 인생에서 할 게 없다’, ‘예술을 안 하면 사는 것 같지가 않다’, ‘예술을 못하게 한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느끼는 사람들 말입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말했듯, “나는 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의 필연성으로 예술에 직면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처음 소를 잡던 시기에는 보이는 건 온통 소뿐이었다”고 말하는 장자의 백정이 지금 신입생 여러분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이는 예술가 수업의 첫 단계로서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초심자로서 이런 ‘몰입의 시기’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굳이 예술이 아니더라도 어떤 대상에 빠지게 되면 온통 그것만 보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 눈엔 지나가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그 사람 같이 보이질 않습니까? 

음악을 하겠다, 무용을 하겠다, 미술, 연극, 영화, 전통예술을 하겠다고 들어온 여러분! 

여러분 눈, 여러분 귀엔 지금 온통 여러분이 잡고자 하는 소만 보여야 하고 들려야 하고, 그래야 마땅합니다. 

만약 여러분 눈에 소가 보였다가 말다가 한다든가, 기분 좋으면 어쩌다 한번 들어왔다가 가버린다든가 하는 사람은 지금 여러분 인생이 불행해지기 전에, 

여러분이 이 사나운 소한테 다치기 전에, 빨리 저 문으로 되돌아나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온통 소만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장자의 명백정처럼 된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온통 소만 보이는 이 단계에서 소 잡는 일이 시작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제가 처음 시라는 걸 쓰기 시작했을 때 제가 시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쓰는 것만으로 즐거웠습니다. 

그리고는 세상 모든 것이 시처럼 보였고 도처에 시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습니다. 

그 당시 완전히 시에 퐁당 빠져가지고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내 머리 위의 대기에 퍼져 있는 시를 내가 이고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심지어는 꿈에서도 썼습니다. 또 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시가 어쩐지 이건 내가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살짝 내 머리가 돈 거거나 맛이 간 거죠. 한 마디로 시에 미쳐 있었고, 시에게 들려 있는(possessed) 상태였다고 할까요. 

들린 상태에서 쓴 내 시를 들린 상태에서 내가 다시 보았을 때 그것은 얼마나 황홀한 것이었는지, 그것은 한밤의 램프불 아래에서 본 세계처럼 위대했고 확고부동한 천재의 징표였으며 어느덧 불멸의 광휘로 감싸여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보면 모든 밤의 근거 없는 자기도취의 장막이 여지없이 걷어지면서 한낱 감상의 토사물이었을 뿐이며 덕지덕지 달라붙은 클리세의 화장발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하게 되었을 때의 그 끝간 데 없는 자괴감, 절망, 분노, 괴로움.... 

더군다나 그런 것들이 내 경쟁자들과 작품 합평에서 비교되고 지적되었을 때 그럴 듯한 갖은 언사로 방어하고 자기정당화를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 한계 때문에 지불해야 했던 감정의 소비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아마 여러분도 여러분이 잡고자 하는 소를 앞에 두고 제가 겪었던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배로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조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예술의 몰입 상태에 있을 때 무조건 먼저 “저질러라”는 것입니다. 

온통 소만 보이는 상태에서 소의 어디를 붙잡고 칼을 어떻게 서야 하는지 누구한테 자세하게 배운 다음 잡으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표현 충동을 존중하십시오. 

초심자로서 여러분의 충혈된 예술의욕을 그냥 따라가십시오. 

예술작품은 요소들의 기계적인 조합이 아닙니다. 

단계별로 부분부분 배워서 짜맞춰나가는 게 아니죠. 

오히려 그것은 먼저 전체가 있고 그 속에 부분들이 자리하고 있는 게스탈트적인 꼴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통으로, 무조건적으로, 그냥 작품의 전체를 만들어보는 겁니다.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다 보면 예술 비슷한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고 그 즐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즐거움입니다. 

이 황홀감, 자기도취 없이 예술, 어떻게 합니까? 즐겁게 하십시오. 예술은 그 처음과 끝이 ‘놀이’입니다. 

가지고 노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도구들, 피아노면 피아노, HD 카메라, 컴퓨터, 혹은 신체나 언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 완전히 너덜너덜하게 닳아뜨려야 합니다.

  

이렇게 놀다 보면 그 다음 ‘발견’의 단계에 이르게 될 겁니다. 

소가 여러분을 발로 걷어차거나 뿔로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프죠. 중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아픔 속에서 그 아픔에 의해 문득문득 자각이 생깁니다. 

이제 여러분은 소를 조금씩 알기 시작합니다. 

이 놈의 소가 왜 내 뜻하는 바대로 안 따라 오는가? 소를 어떻게 유혹하는가? 그리고 어느 급소를 일거에 찔러야 하는지? 

소한테 계속 받치고 얻어맞고 어쩔 때는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받는 가운데 소를 깨달아 가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어떤 사람은 타고난 재주 탓인지 소한테 몇 대 안 얻어터지고도 탁, 소를 잡아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자동차 운전도 처음에 작은 접촉사고 많이 낸 사람이 대개 치명적인 대형사고를 내지 않듯이, 처음에 자주 얻어터진 사람이 소의 생리를 몸으로 더 많이 익혀 나중에 결정타를 덜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결정타를 얻어맞은 자라야 끝내는 저 사나운 숫소마저 제압할 수 있습니다. 

요는 얻어맞았을 때의 여러분의 태도입니다. 

여러분의 작업이나 작품의 결과가 비교되고 지적되었을 때 그 뼈저린 자기 한계에 대한 쓰라린 자각 때문에 ‘

아, 나는 안돼’, ‘난 아닌가 봐’ 하고 그만 둬버리느냐---

물론 빨리 자기 진로를 변경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비록 결정타를 맞았을지라도 자기가 실수한 것, 틀린 것으로부터 소에게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배우느냐는 예술 수업 태도의 커다란 차이입니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저는 여러분에게 “실수하면서 배워라, 틀리면서 찾아가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예술은 단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며 그런 정답은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이 젊은 시절에 실수한 것, 혹은 틀린 것이라고 생각된 것들 속에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예술의 통로가 예비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사람은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 길을 찾는 자는 여러 틀린 길들로 헤맨 자들입니다. 

모든 시대의 아방가르드들에게 길은 가다보면, 어느 새 뒤에 따라와 있습니다. 나중에야 그게 道였다는 걸 알게 되지요. 

  

장자의 백정은 고수, 선수, 마에스트로 특유의 오만함과 자기과시의 제스추어가 넘쳐나 보기에 거북스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지 칼 자랑하는 것 좀 보십시오. 

19년이나 된 칼이 방금 숫돌에서 갈아놓은 것 같다지 않습니까. 

보통 백정의 칼은 한달에 한번씩 칼을 바꾸고, 좀 한다는 자의 칼은 1년에 한번 바꿔줘야 하는 까닭이 이 아마추어나 이류들은 실수를 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칼날이 뼈에 닿지 않아야 하고 근육을 썰지 않고서 어떻게 소 한 마리를 깔끔하게 발라내는가?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칼날에 두께가 없어지고 어떻게 해야 여러분 눈에 소의 뼈와 근육 사이에 커다란 틈과 구멍이 보이게 될 것인가? 

한 마디로 소 잡는 도를 트라는 것인데, 솔직히 저 자신이 아직 그 도를 알지 못 하며 이 학교가 여러분에게 그 도통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예술사과정 4년과 혹은 전문사과정 3년을 다니는 동안, 여러분은 줄곧 소에게 얻어터지면서 깨달아가는, 그래서 예술에 다가가는 ‘황홀과 괴로움’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고통스러운 ‘발견’의 단계에 있게 될 것이며, 사실 여러분이 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평생 동안 그렇게 고통을 새기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0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신입생 여러분! 예술이라는 이 즐거운 지옥에, 이 각고의 시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을 열렬히 환영하고 축하합니다.

  

2008년 3월 5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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